예약이 필요 없는 한라산 영실코스
예압! 드디어 한라산을 다녀왔다. 그동안 제주도를 수없이 찾아왔지만 한라산은 뭐랄까.. 전문가적인 요소가 필요한 산인 것 같아서 늘 코스에서 걸러내곤 했는데, 이번엔 다르다. 인터넷으로 철저하게 사전조사를 해봤는데, 한라산 영실코스는 별도로 예약을 하지 않아도 되고, 아이들과 함께 등반할 수 있을 정도의 난이도라고 하더라. 그래서 일단 몸으로 경험해보자는 마인드로 일정 중 하루를 한라산에서 보내기로 했다.
영실휴게소 주차장
- 네비로 영실휴게소 찍고 오면 OK
- 시간이 오래걸리더라도 무조건 제1주차장에 주차하세요. 뒤지게 힘듭니다.
주차는 제발 제1주차장..
한라산 영실코스는 제1주차장과 제2주차장이 있다. 제일먼저 만나게 되는 주차장은 제2주차장이고 영실코스 입구 바로 앞에 있는게 제1주차장이다. 만약 입구쪽에 자리가 없을 경우에는 대기를 먼저 들어간 차들이 빠져나올 때까지 제2주차장에서 대기를 해야 한다.
우리가 도착한게 08:30분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차들이 줄지어 서있었더라... 처음에는 우리도 기다려볼까 하는 마음으로 대기를 했는데, 차들이 도무지 앞으로 나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바로 핸들을 돌려 제2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절대 그러지 말아야 했다.
한라산 영실코스 제2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2km를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트래킹에 자신 있는 편이라 2km는 껌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이건 오만이었다. 언덕이 리얼로 빡셌고 길 자체가 드래곤볼z에서 오공이 죽고 나서 계왕을 만나러 가는 그 길하고 진짜 똑같이 생겨서 입산하기도 전부터 땀이 나더라.
그냥 혀 깨물고 기절해버릴까? 싶었는데 하늘에서 한 줄기 빛이 내려왔다. 앞에서 걸어가던 여성 두분이 올라가기가 너무 힘드셨던건지.. 중간에 택시를 잡아타시더라. 중간도 아니고 200m 지점이었나봄ㅋ 그러면서 "걸어 올라가지 말고 같이 타고 가요! 우리가 계산할게" 라고 하시길래 바로 침 질질 흘리면서 탑승했다. 이분들 아니었으면 한라산에서 혀 깨물었을듯ㅋ 계산할 때 요금 얼마인지 보니까, 기사님이 작정하시고 미터기를 안키셨더라.. 5분 타고 10,000원 냄...
혹시라도 제2주차장에 주차했다면.. 영실코스 입구까지 순보 쓰면서 올라가야 30분 컷, 설렁설렁 걸어가면 40분~1시간 정도 걸리니.. 주차장을 잘 선택하자!
오백장군과 까마귀
많은 사람들이 인증샷을 찍는 바로 그곳, 영실휴게소인 오백장군과 까마귀다. 인터넷으로 찾아봤을 때 도대체 왜 이렇게 허름한 건물에서 사진을 찍을까? 싶었는데, 정말 그럴 수밖에 없더라. 건물이 이거랑 화장실밖에 없어서 딱히 뭘 찍을만한게 없었다.
오백장군과 까마귀 내부는 대충 이렇게 생겼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식사류와 차, 그리고 등산용품들을 판매하고 있어서 입산하기 전에 음식을 먹고 출발하거나 하산 후 방문하기에 좋은 장소 같았다. 다른 블로그에서 필수라고 하던 주먹밥도 4,000원에 판매하고 있었다. 우리는 다른 간식 하나 없이 주먹밥 2개만 달랑달랑 들고 한라산 영실코스로 입산했다.
한라산 영실코스
09:00 입산
출발지점부터가 해발 1,280m다. 어쩐지 차를 타고 오는 도중에 자꾸 귀가 먹먹해지던데.. 오늘 길 자체가 엄청 높았구나...
한라산 영실코스가 예약이 필요 없다고 하더라도 다른 한라산 코스와 마찬가지로 입산/하산 제한시간이 존재한다. 혹시라도 입산 가능 시간을 잘 몰라서 헛수고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길 바란다.
초반 코스 자체는 상당히 EASY했다. 거의 평지에 드문드문 계단만 있을 뿐, 특별히 어려운건 없었다. 체력이 살짝 부족한 여자친구도 이때까지는 한라산이 아주 쉽게 느껴진다고 했다.
난이도가 정말 쉬운 건지.. 꼬맹이들도 우리를 빠르게 치고 나가더라. 근데 여기서부터가 슬슬 헬구간이다.
어느 정도 올라가니, 여자친구도 말이 없어졌고, 내 이마에도 송글송글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디쯤 올라온 건지 궁금해서 뒤를 돌아보니.. 엄청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 이런게 바로 절경이구나.
바로 옆에는 보기만 해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병풍바위가 있었고 우리 앞에는 끝없는 계단이 펼쳐져 있었다.
♬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서늘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이 노래가 진짜 찰떡인게,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과 내리쬐는 햇빛 때문에 몸은 녹아내리려고 하는데.. 가끔씩 바람이 휭~하고 불어오면 몸이 으슬으슬 떨려오더라. 당근과 채찍인줄ㅋ
한라산에는 이제 막 진달래가 피어나고 있었다. 정확한 명칭으로는 털진달래라고 하는 것 같은데, 털은 안보였다.
슬슬 당이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우리가 가져온 음식이라고는 까마귀네 주먹밥뿐.. 슬슬 앞길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조금 더 나아가니 다른 블로그에서 봤었던 장소가 나온다. 이곳이 선작지왓이라고 하던데,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실제로 보는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이곳의 바람은 제법 강하게 불어와서 언제 땀을 흘렸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고 손을 쭉 뻗으면 구름이 잡힐 것처럼 하늘과 가까웠다.
11:00 윗세오름 휴게소 도착
선작지왓 길 따라 쭉 걸어가면 윗세오름 휴게소가 나온다. 휴게소라고 해야 하는지, 대피소라고 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여기가 도시락을 까먹는 장소인건 확실하다. 남들은 가방에서 성능 좋은 따땃한 도시락과 컵라면을 꺼내먹는데.. 우리는 비닐봉다리에서 주먹밥을 주섬주섬 꺼내먹었다.. 이미 온기가 식어버린 주먹밥이었지만 김치가 들어있어서 그런가, 게눈 감추듯 흡입했다.
이제 여기서 선택을 해야 한다. 윗세오름 휴게소를 찍었으니 그대로 하산할 것인지, 그게 아니면 영실코스의 최종 목적지인 남벽분기점 전망대를 찍을 것인지 말이다.
우리는 언제 다시 한라산에 올지 모르니.. 화끈하게 남벽분기점까지 다녀오기로 했다.(사실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윗세오름 전망대까지는 분명 날이 맑았는데, 바람 한번 슝~ 불어오니깐 갑자기 흐려지더라. 게다가 남벽분기점까지 가는 사람들이 없어서 그런가.. 미국 공포영화에 나오는 으스스한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연출되더라.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니 방아오름 전망대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여자친구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겠다고 GG를 쳤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여자친구에게 전망대에서 기다리라고 말한 후 혼자서 남벽분기점으로 달렸다.
하늘은 다시 맑아지고 저 멀리 남벽분기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저기가 최종 목적지인지 확인하고 싶어서 주변 등산객들에게 여쭤보니 저기가 맞다고 했다.
12:10 남벽분기점 도착
입구에서부터 남벽분기점까지.. 3시간 걸렸다. 솔직하게 말해서 남벽분기점까지 찍고 보니, 그냥 윗세오름 휴게소에서 주먹밥 먹고 도망갔다면 어땠을까 싶더라. 오는 길에 뭐 딱히 볼만한 것도 없었고 그냥 풀만 가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왔으니깐 끝까지는 가보자는 심보로 오긴 했는데, 오고 나니깐 두 다리만 후들거릴 뿐.. 기억에 남는 건 없던 것 같다.
14:00 주먹밥 상점 도착
다시 발걸음을 돌려 여자친구와 합류하여 초고속으로 하산을 하니 내려오는데만 2시간이 걸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윗세오름 휴게소에서 주먹밥만 먹고 튀는게 진짜 깔끔했을 것 같은데, 괜히 욕심을 냈던 것 같다. 하산 도중 여자친구가 오른쪽 다리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통증을 호소하는 바람에 시간이 살짝 지연되긴 했지만, 그래도 5시간 정도면 나름 준수한 속도가 아니었나 싶다.
남들처럼 중간중간 쉬어가며 과자도 먹고, 사탕도 빨면서 당을 충분하게 섭취했다면 컨디션도 기모찌 했을 텐데 해병대 지옥주마냥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먹고 공복 상태로 올라간데 문제였던 것 같다. 그래도 난생처음으로 한라산에 올랐고, 백록담을 바로 눈앞에서 봤다는 것 자체가 나와 여자친구에게 정말 큰 추억으로 남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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